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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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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glow01 2022. 9. 26. 00:07

아무도 모르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고백하자면, 내가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한 건 마중물샘 때문이었다. 마중물샘이 우쿨렐레를 치며 아이들과 노래를 불렀다는 글을 읽고,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여 따라하고 싶었다. 블로그에 열심히 일기를 올리는 것도 실은 마중물샘을 따라하는 중이다. 마음 깊이 존경하고 응원하는 마중물샘, 차마 그 신념과 긍지는 따라할 자신이 없으니 껍데기라도 열심히 '손민수'하는 것이다. 마중물샘이 알라딘 북펀드로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장 달려가 펀딩을 했지만 참여자 명단에 이름은 올리지 않았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참여자 명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소리내어 읽었다는 트윗을 보고 속으로 울었다. 아! 나도 이름 올릴걸!!

그렇게 도착한 책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를 한동안 모셔만 놓고 있다가, 오늘 카페에 가지고 가서 읽었다. 이미 블로그에서 읽었던 내용이 반 이상이라서 익숙했음에도 마음이 여러 번 움직였다. 한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카페 한가운데라는 걸 깨닫고 머쓱하게 다시 앉았다. 나는 일어나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아마 걷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의 기록은 2020년부터 시작된다. 닷페이스의 영상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를 이유로 쏟아진 남초 커뮤니티와 보수 단체의 음해와 공격에 맞서 싸운지 2년이 지난 시점이다. 재판은 끝났지만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한 회복의 길, '다시 내가 되는 길'에 마중물샘이 서 있다. 그리고 한 걸음씩, 걷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 자박자박한 발걸음을 함께 걷는 일과 같다. 사랑스런 아이 별이의 손을 잡고 마중물샘은 걷는다. 어떤 날은 한 걸음, 어떤 날은 반 걸음. 양수리의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천천히. 반의 반 걸음을 걸은 날에도 마중물샘과 별이는 꼭 껴안고 춤을 추며 기뻐한다. 어떤 날에는 단 한 걸음도 뗄 수가 없다. 아픈 몸이,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영원히 생생할 것만 같은 고통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러나 마중물샘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렇다고 섣불리 그것을 '극복'했다고 선언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잠시 주저앉아서 고통이 몸을 통과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걷는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사이에 난 '샛길'에서. 지치지 않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넘어지는 마중물샘, 일어나는 마중물샘, 별이와 함께 요가를 하는 마중물샘, 요양병원에 입원해서도 신나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마중물샘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큰 용기를 얻었다. 나는 마중물샘이랑 비슷한 일조차 겪은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용기를... 가끔 음식을 입에 넣고 나서야 내가 배고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용감한 이의 기록을 읽고, 그 기록에서 용기를 얻은 후에야 나는 내가 그동안 좀 아팠고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몇 년째 스스로에게 쫓겨 달리고 있다는 것을. 지쳤으면서 스스로는 멈출 생각도 못하고 언젠가 무릎이 꺾여 쓰러질 것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물론 이것은 마중물샘의 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용기를 내어 자기 고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너머로 천천히 걸어나갈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쫓기듯 달려가지도 않고 아예 드러눕지도 않고 천천히 산책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마중물샘의 책은 어쩌면 회복 가이드북이다. 걸을 때는 한 번에 한 걸음씩만.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중간에 멈춰도 됩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유머, 연대, 그리고 사랑.

책을 읽는 내내 창밖에서는 초록 나뭇잎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책을 덮고 나서는 프랑스어 단어 공부를 조금 하고, 내일 통합수업 시간에 할 게임을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색연필로 색칠하면서 조금 행복했다. 나는 따라쟁이니까 마중물샘처럼 이 행복도 블로그에 꼭꼭 적어둘 것이다. 이 글을 쓰느라 잘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그래서 내일 피곤할까봐 걱정이 되지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둬서 조금 용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