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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얘기

뮤지컬 <광주> 여전히-언제나 시급한 현재

slowglow01 2023. 5. 17. 23:53

나는 뮤지컬을 아주 좋아하는데
사실 뮤지컬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얘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뮤지컬 영화', 그중에서도 대부분 20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무대에 올라가는 뮤지컬을 보러 가기에는 돈도 없고, 기력도 없고,
그 두 가지가 다 있다고 해도 여기는 지방이라 뮤지컬 공연 자체가 별로 없다.
전세계에 흥행하는 프랜차이즈 뮤지컬보다 1950년대 MGM 뮤지컬 영화의 접근성이 더 높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뮤지컬을 좋아하지만 정작 뮤지컬(무대) 감상 경험은 별로 없으며
내가 아는 뮤지컬 배우들이란 프레드 아스테어(1899~1987)나 주디 갈란드(1922~1969) 같은 사람들뿐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뮤지컬로서의 광주에 대해 궁금했다면 이 글에서 얻어가는 게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린다.

저는 이런 거 좋아한다구요..


그런데 요즘은 옛날 영화를 찾아보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최근에 본 뮤지컬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한 <영웅> 그리고 <킬링로맨스> 정도다.
하... 킬링로맨스 진짜 골때리고 재밌는 영환데....ㅋㅋㅋㅋㅋ
하지만 지금은 <영웅> 얘기를 하려고 한다.

연구회 선생님들과 뮤지컬 <광주>를 보러 가기로 했을 때
나는 <영웅>의 5.18 버전을 예상했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다.ㅋㅋㅋㅋㅋ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창작물들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하면 왠지 매국노처럼 들릴 것 같지만.
그치만 <영웅> 같은 뮤지컬을 보러 갈 때 우리 모두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 하는 면이 있지 않는가.
아픈 역사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객들을 과도한 감정적 고양으로 이끄는 것밖에 없다는,
유머, 상상력, 새로운 질문과 대화의 가능성 같은 것들은 '불경한' 해석이라는 그런 태도들.
관객들은 다들 조금씩 불만스럽지만
그래... 아픈 역사인데... 하면서 순순히 영화가 시키는대로 울고 화내고 감동받아주는 그런 작품들... 다들 알잖아요?

뮤지컬 <광주>의 홍보자료들에는 정확히 그런 종류의 비장함이 흘러넘쳤고
심지어 <광주>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작품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내가 오월광주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시민인 것과 별개로
이 작품을 한 편의 뮤지컬로서 즐겁게 관람할 자신은 없었다.ㅋㅋㅋ
그치만... 광준데. 광주가 처음으로 뮤지컬로 나왔는데.
봐야지 어쩌겠어. 안 볼 도리가 없잖아. 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향했다.


이러한 나의 예상은 슬프게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중 내가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작품 포스터에서부터 '우리들의 사랑, 명예, 이름'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은 당연히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서 따온 카피다)
정작 인물의 개성과 복잡성이 부족하여 인물들을 하나하나 구별하고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감정적 고양을 위해 초반부부터 몰아치는 "감동!"의 연속 때문에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위대한 오월 광주의 민중들'(심지어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을 감히 약점을 지닌 인물로 묘사할 용기가 없었던 제작진의 경직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윤상원 열사를 바탕으로 한 주인공 윤이건은 <영웅>의 안중근이 나이만 젊어진 채 광주에 내려온 것처럼 보인다.
초반까지는 '역시 그렇구나' 정도로 생각하면서 보았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감동을 안 받은 것은 아니다.
눈앞에서 배우들이 518을 노래로 부르는데... 광주사람이 어케 멀쩡함....
몇 번 울컥했다...

그런데,
후반으로 갈수록 이 작품은 점점 <영웅>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벅찬 멜로디의 노래를 쉼없이 부르지만
더 이상 이 작품은 관객을 울리고, 분노하게 만들고, '뽕'에 차게 만드는 데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오월 광주의 위상은 일제강점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오월 광주에게는 그보다 시급한 과제가 있기 때문에.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창작물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고
그 만듦새도 천차만별이지만
걸작이든 졸작이든 <광주>만큼 특수하고 절박한 메시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 165분짜리 뮤지컬은 시종일관, 아주 분명하게, 관객을 향해 직접적으로,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그게 이 작품의 주제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명예를 지켜주세요.

아 그렇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오월 광주는 일제강점기가 아니다. '그래 우리의 아픈 역사지' 하고 모두가 공감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오월 광주의 시민들은 오명을 벗고 '역사 속에서 승리자로 기억되기 위해' 그곳에서 죽었다. 40년이 지나 뮤지컬 <광주>의 제작진은 여전한 오명을 벗기 위해 노래를 쓴다. 오월 광주는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다. 오월의 노래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그래서 누군가를 울리고 감동시킬 여력이 없다. 거의 모든 넘버의 가사 속에서, 윤이건과 박한수의 대화 속에서 '진실'과 '명예'라는 낱말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그 증인으로 관객들을 소환한다. <광주>가 관객들에게 요청하는 바는 아주 구체적이다. 오월 광주를 1)기억하고 2)알리고 3)바로잡으라고.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당신이 하라고. <광주>의 후반부에서 배우들은 자꾸 무릎을 꿇는다. 관객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오월 광주는 여전히 절박하고 그래서 아무 것도 돌려 말할 수 없다.

<광주>는 한 편의 뮤지컬로서 얼마나 훌륭한가? 처음에 밝혔다시피 나는 뮤지컬을 몇 편 안 봤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홍보사에서는 '아시아의 레미제라블'이라고 하던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아니고, 사실 누군가에게 "강추 대박 인생 뮤지컬" 뭐 이렇게 소개하기도 좀 그렇다. 그러나 윤이건과 문수경이 비록 장발장과 팡틴이 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1980년에 그들은 할 말이 있었고 2023년에도 여전히 할 말이 있다. 그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이 좀 잘됐으면 한다. 광주시민이 아닌 타지역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이 명확해 보이는) 작품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잘돼서 전국투어 한번 꼭 돌아줬으면.

https://v.daum.net/v/20230516170018855

 

5·18 앞둔 광주 특이 동향…정보당국, 주요기관 경계태세 강화 요청

기사내용 요약 정보당국, 교통·중요시설 등 관련 정보 수집 정황 파악 [서울=뉴시스]김지훈 기자 =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행사를 앞두고 지역 내 특이 동향이 감지돼 정보당국이 주시하고

v.daum.net


이 글의 초안을 오늘 퇴근하면서 머릿속으로 썼는데, 집에 와보니 상상도 못했던 워딩이 기사 제목으로 나와 있었다. 아니 내가 5.18이 시급한 현재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right now 당장일 수가 있냐... 언제나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정부여... 이런 기사까지 나왔으니 가짜뉴스 렉카들
은 얼마나 신이 날까? 진실의 길, 명예의 길은 어쩜 이렇게 오르는 건 한없이 고되고 가파르면서 뒷걸음질은 순식간일까? 그러나 별 도리가 없다. 오월 광주의 후손답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꾸역꾸역 나가는 수밖에. 같이 갑시다. 뮤지컬처럼 춤추고 노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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