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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얘기

요즘 뭐 읽고 보고 사세요?

slowglow01 2023. 6. 25. 16:14

2023년 상반기가 다 지나간 기념으로 요즘 읽거나 본 컨텐츠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에게 2023년은 대 깔짝거림의 해라서 한 50권쯤 펼쳐본 것 같은데 다 읽은 책은 방금 세어보니까 겨우 12권이더라. 재밌었으면 됐어~

1. 1984(조지 오웰, 김승욱 옮김, 문예출판사)

 얼마 전 재밌게 읽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리처드 로티)>에서 <1984>에 대한 꽤 자세한 비평을 다루었기 때문에 궁금해져서 읽게 됐다. 사실 이 책을 굳이 사서 읽을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너무 유명한 책이라 내가 이 책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주제, 줄거리, 결말,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모두 이제는 그냥 현대인의 교양 수준이기 때문에... 읽어야 할 책 많은데 굳이? 그러나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은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엄중한 경고~"만으로는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부분을 많이 갖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책이 몹시 동시대적이라는 점이었다. 아 물론 조금이라도 사회비판적 성격을 가진 모든 디스토피아 sf 소설에는 "동시대적이다!!"라는 평이 당연히 따라오지만ㅋㅋㅋ 아이스크림이 차가워요 같은 소리인 거 알지만ㅋㅋㅋ 그치만 오웰의 아이스크림은 역시 원조라 그런지 좀 특별히 차갑다. 어떤 부분은 꼭 2023년의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일부러 던지는 지독한 농담처럼 보일 정도다. 특히 신어에 대한 부분이 마음을 섬뜩하게 했는데, 최근의 문해력 논쟁 그리고 언어의 빈곤화에 대해 좀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오웰 알못이라서 이제야 깨달은 건데 놀랍게도... 꽤나 아름다운 부분들이 있다. 가끔 sf소설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되려 좀 당황해서 뭐야; 님 왜 여기서 이렇게 써요;; 싶어지는데 (편견 죄송합니다. 근데 sf에서 미문 찾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이 책이 그랬다. (그 외 수상하게 아름다운 sf작품으로는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케이트 윌헬름)>와 <사람의 아이들(P.D.제임스)> 등이 있습니다) 오웰이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한 대상이 윈스턴과 줄리아 같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아니라 일상의 노동을 수행하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이었다는 점도 좋았다.

2. 인어공주 (롭 마샬, 2023)

 실사판 인어공주의 피부색에 대한 트롤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그럴 가치가 없음). 영화를 보기 전에도 한심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더 화가 나서 허공에 대고 야 이놈들아 할리 베일리를 욕하다니 제정신이냐? 할리가 없었으면 이 영화는 더 망했어... 이 영화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건 할리뿐이라고 이 인종차별주의자들아... 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할리가 이 구린 영화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고...(성공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기묘하고(queer) 비극적인 인어의 사랑 이야기지만,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사실 물고기 꼬리만 달고 있는 하이틴 소녀의 성장기다. 부모와 갈등하고 있는 외롭고 답답한 두 젊은이가 서로를 발견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지금까지 천 번은 반복됐지만 유구하게 힘 있는 이야기. (써놓고 보니 얼마 전 개봉한 픽사의 <엘리멘탈>도 정확히 이런 이야기네) 실사영화는 이 이야기에서 애니메이션을 걷어내고 진짜 살아있는 젊은 배우들의 얼굴을 내세움으로써 이 이야기를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이 지점에서 할리 베일리의 노래와 연기는 훌륭했고 왕자는 뭐 그만하면 귀엽게 잘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원작처럼) 80분 정도의 하이틴 뮤지컬 판타지였으면 딱 신나고 감동적이고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15분이고;; 남은 시간은 쓸데없이 사실적인 불쾌한 cg! 진짜 안 궁금하고 관심없는 해상액션! 그리고 온갖 지루한 사족들이 채우고 있다. 이야기는 전혀 복잡해지지 않았는데(솔직히 인어공주 줄거리 모르는 사람 어딨어요. 다 언더더씨 들으러 온 거지) 거기다가 뭘 주렁주렁 달아놓으니까 무겁고 처지고 답답하다. 배우들이 열심히 힘을 냈지만(아콰피나 스커틀 짱이었음ㅋㅋㅋㅋㅋ) 음 그냥 디즈니는 실사영화를 그만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3.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마이클 슈어, 염지선 옮김, 김영사)

 마이클 슈어는 드라마 <굿 플레이스>의 제작자이고, <굿 플레이스>는 윤리적 고민들을 유쾌하고 영리하게 풀어낸 재미있는 드라마다. 그래서 난 이 철학책이 대중픽이라고 굳게 믿었음ㅋㅋㅋ 얼마나 굳게 믿었냐면 "이 책은 쉽고 재미있을 거예요" 하고 독서모임 책으로 자신있게 추천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는데,

 1. 대중들은 일단 철학책이란 걸 안 읽는다. 따라서 대중픽 철학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2. 윤리학이라는 학문은 제아무리 마이클 슈어가 애를 써도 어쨌든 별로 재미가 없는 학문이다...

 결론적으로 난 독서모임 회원분들에게 몹시 죄송해지게 되었다. 그전까지 하이데거 아도르노 니체 이런 양반들이랑 싸우고 있었다보니 (다 독일인들이네.. 젠장 난 독일 철학자들이 너무 싫다) 재미에 대한 감각이 고장나서 '어? 아리스토텔레스 정도면 재밌는 거 아닌가?'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난 아직도 공리주의는 진심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트롤리는 재밌잖아...
 아무튼 이 책에 대한 평을 하자면 <굿 플레이스>에 대한 한 편의 해설서 같은 느낌이다. 덕 윤리와 공리주의, 칸트의 정언 명령, 그리고 계약주의와 불교철학까지 나아가며 옳고 그른 행동에 대해 탐구하지만, 사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작품은 <굿 플레이스>가 아니라 초딩 시절 읽었던 <앗,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 시리즈였다.ㅋㅋㅋㅋㅋ

기억하시는지?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 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을 거의 퍼붓는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문장이 농담이고 일러스트도 다 농담이며 (보다시피) 제목도 농담이다. 재미없는 과학을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이해시켜야겠으니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쉬지 않고 익살을 부리는 것이다. 이 방법이 제법 통했는지 이 시리즈는 90년대생 초등학생들에게는 꽤나 베스트셀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90년대생은 이제 직장인이 되었고 이런 농담에 웃어주기에는 너무 피곤해졌다. 게다가 윤리학은 교양 수준에서는 과학보다도 더 재미가 없다. 난 그저 읽으면서 '애쓰십니다...'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굿 플레이스>도 윤리학과 농담의 짬뽕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거기에는 줄거리와 연출, 음악과 배우들이 있어서 더 활기가 있었단 말이다.
 이렇게 욕만 했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꽤 즐겁게 읽었다. 너무 오랫동안 독일과 프랑스 놈들의 딜레탕트니 주이상스니 이런 말들에 시달려오다가, 철학이란 본래 삶과 닿아 있는 고민이라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대화라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윤리적 피로감이라는 용어가 지금의 내 상황과 너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많이 위로가 되는 지점이 있었다. 아무튼 난 이제 독서모임에 철학책은 추천 안 하기로 했다. 정말 죄송했어용...

4. 또, 바람이 분다(주로미·김태일, 2022)

 2023 광주독립영화제 개막작. 퇴근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솔직히 말하면 평일 저녁 7시에 다큐멘터리 영화는 직장인에게 무리였다. 영화 후반부에는 '아 너무 졸리다.. 운전 못할 것 같은데 집 갈 때 대리 부를까? 근데 여기서 부르면 이만원 넘게 나올텐데... 아냐 목숨보다 이만원이 싸지'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작 극장을 나와 찬공기를 쐬니 잠이 깨서 운전 잘 하고 왔다) GV할 때는 (너무 피곤해서) 중간에 일어나고 싶어서 눈치만 보다가 결국 못 일어났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다. 광주, 캄보디아, 보스니아, 팔레스타인의 여성들의 삶을 교차하며 탐구한다는 기획도 좋지만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제작진이 바로 '상구네' 가족이라는 점이다. 민중사에 관심이 많은 감독 엄마아빠와 노는 게 좋은 아들과 딸이 10년 동안 전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비며 영화를 만든다. 절대 인터뷰이를 사전에 선정하지 않는다는 부부의 철학 탓에 촬영은 기약없이 길어지고, 처음에는 순순히 따라다니던 남매도 점점 머리가 커지며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빚어진다. (솔직히 아이들을 팔레스타인에 데려간다는 생각에는 나도 입을 딱 벌렸다) 특히 사춘기 아들의 말발이 상당해서 관객들이 많이 웃었다.
 전세계의 억압받는 민중 여성들의 역사...라는 거대한 주제는, 이 투닥거리는 4인가족의 이야기 옆에 나란히 놓이면서 함께 힘을 빼고 가벼워진다. 이 가족이 전세계를 돌며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들과 같은 가족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보스니아에서 로마니(집시) 아이들을 위한 오락실을 운영하는 아멜라, 캄보디아의 정글에서 하루종일 농사를 짓는 슬리와 네이멕, 팔레스타인에서 빵을 굽는 노우라와 광주 대인시장에서 리어카를 끄는 하문순, 평화반점에서 자장면을 볶는 박복자까지.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전쟁과 차별, 폭력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들의 삶에 드리워 있다. 그 아래서 그들은, 여성들은 그저 자기 일을 한다. 일하는 여성들, 투덜거리며 자라는 아이들, 고되게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민중이라는 이름은 힘과 부피를 갖는다.
 오늘 1984를 읽으면서 이 영화를 많이 생각했다. "생각하는 법을 한 번도 배우지 못했으면서도 가슴과 배와 근육 속에 언젠가 세상을 뒤집을 힘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사람들."

5.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리처드 로티, 김동식·이유선 옮김, 사월의책)

 전기가오리 독서모임으로 읽게 된 책. 나는 모든 책을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 읽고, 그래서 읽은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데, 그럼에도 어떤 책은 머릿속에 영원히 남아 삶의 많은 결정의 순간에 함께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은 지는 3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3주 내내 로티 선생은 내 머릿속에 살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듯하다.
 정말 고리타분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어렵고 딱딱하지만, 사실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책. 요약하자면 우리가 언어, 이론, 신념, 철학이라 부르는 것들은 우연성에 기초하고 있는 순전히 사적인 자아창조의 영역이며, 인류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이상 또는 인간성 같은 것은 없다! 연대의 희망은 그런 보편적 이상이 아니라 개인의 개별적인 선택들에서, 그리고 잔인성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철학자와 소설가들의 이론과 작품을 비평하면서 주장을 전개하는데, 등장하는 인물들로만 교실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철학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짜증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ㅋㅋㅋ 기본적인 입장부터 철학의 중요성을 상당히 폄하(?)하고 있기도 하고 또 그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잊을만 하면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한 페이지에 한 번씩 철학을 찰싹! 찰싹! 찰싹! 때리니까 철학자 입장에서는 아 알았다고!! 그만하라고!! 싶을 것 같았다.ㅋㅋㅋ 하지만 난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주장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철학은 근본적으로 눈송이처럼 아름다운 언어놀이이고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우리 인생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참 좋았다. 그리고 아이러니스트로서의 프루스트를 설명한 부분도 인상 깊었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것만으로 나의 상반기 독서인생은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책장에 쌓여있는 읽다만 철학책들은 일단 필사적으로 무시중... 나중에 지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읽을게... 지금은 학기말이라 걍 바보됨

6. 납치된 도시에서 길 찾기 (전현우, 민음사)

이 책은 귀여우니까 특별히 실제사진으로

 책을 읽는 환경과 책의 내용이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그래서 2년 전 혼자 여수로 여행을 갔을 때 일부러 <외로운 도시(올리비아 랭)>과 <관광객의 철학(아즈마 히로키)>를 들고 가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수서발 광주송정행 srt에서 읽은 것은 진짜 신의 한 수였다. 너무 재밌고... 서술이 가끔 덜컹거리는 부분이 있어도 기차와 함께라면 즐거운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책이 기차에서 읽기 딱 좋게 작고 귀엽기까지 함ㅠㅠ 민음사 탐구 시리즈 지금까지 두 권 읽었는데 좋더라. 더 찾아 읽어봐야지.
 혹시 여러분은 교통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저는 전혀 없습니다... 7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구조도 헷갈리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운전을 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깨닫게 되는 게 있는데 그런 점에서 더욱 재미있었다. 모두의 안전이 위험한 기후위기 시대, 탄소배출을 줄이기 가장 어려운 분야가 바로 교통이고 그것은 무엇보다 자동차 때문이다. 자동차는 우리의 삶과 도시를 어떻게 바꿔놓았으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에 대한 책이다. 20살이 넘은 한국인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재미에 대한 감각이 고장난지 오래고...)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리처드 세넷)>을 몇 달째 아주 천천히 읽고 있는데 함께 생각해볼 부분이 많아서 흥미롭다.

7.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한강 소설 두 권 이상 읽는 사람은 광인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아무래도 남한테 함부로 광인이라고 하면 안 되죠) 한강 팬으로서 솔직히 나는 동의한다. 행복하고 건강한 정신의 사람들이 한강을... 왜 읽냐? 한강은 언제나 고통 한 가운데 서 있다. 한강을 읽는다는 것은 그 고통 옆에 자신의 고통을 나란히 두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 눈에는 마조히스트처럼 보이겠지만 아픈 사람들은 그 경험으로 위로받는다.
 최근 전국 여러 지역에서 오신 선생님들께 5.18국립묘지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안내할 일이 있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처음인데 심지어 주제가 5.18이라니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의를 위해 원고를 쓰면서 나는 또 익숙한 생각과 싸워야 했다.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게 존나 무슨 소용이냐... 라는 생각.
 열한 살 때 엄마가 죽은 이후로 난 죽음에 집착하게 되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쓰는 모든 글은 다 죽음에 대한 글이다. (이것 봐, 지금도) 그러나 몇 번이고 되돌아오게 되는 결론은 무의미와 불가해였다. 죽음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끝난다. 그 다음의 모든 것은, 죽은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산 사람에게는 불가해한 것이다. 한 마디로 아무 소용 없다고. 나는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사이다' 추리물이나 액션물을 보지 못한다. '피해자는 이미 죽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었는데. 죽었는데. 죽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5.18은 내게 거대한 통곡의 벽이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있는 광주의 후손이므로 그 일을 기를 쓰고 기억하고, 거기서 뭔가를 발견하려 한다. 가끔 성공한 것 같을 때도 있다. 진심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통째로 그 일에 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냥 벽 앞에 주저앉아 있고 싶을 때도 있다.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었다는 간단한 사실을 영영 극복하지 않으/못하면서.

 5.18을 담은 <소년이 온다>에 이어 제주 4.3을 다룬 이 책에서, 소설가 경하가 바로 그렇게 주저앉아 있다. '5월에 한 도시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한 소설'을 쓰고, 경하는 다음 소설로 가뿐히 넘어가지 못한다. 고통이 거기 있는데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나... 그 마음이 뭔지 조금은 안다. 주저앉아 있는 경하에게 친구 인선의 전화가 걸려온다. 목공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서 서울 병원에 왔는데, 제주도 집에 있는 앵무새 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다고. 앵무새가 굶어죽지 않게 제주에 가서 돌봐주라고.
 작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한 경하의 여정은 죽음과 흡사하다. 폭설이 내리는 제주의 산속은 어쩌면 경하가 이미 죽어 헤매고 있는 지옥인지도 모른다. (죽은) 경하가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새는 이미 죽어 있고 대신 새의 그림자만 살아 방 안을 날아다닌다. 그리고 서울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멀쩡하게 찾아온다. 인선도 죽은 것일까. 그 집에서 (죽은) 인선은 (죽은) 경하에게, 70년 전 제주에서 있었던 일과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집 밖으로 나간다. 경하는 인선을 따라 나와, 캄캄한 산속에서 인선을 찾기 위해 성냥불을 켠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강이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당신이 무슨 고민을 했는지 안다고, 나도 그 고민을 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7년 동안 제주는 고립되었다, 마을이 초토화되고 최소 3만 명이 죽었다, 이런 문장들은 거대한 벽과 같다. 죽음의 벽, 학살의 벽을 살아 있는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넘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고 경하는 그 벽을 넘어가기 위해 제주에서 죽는다. 경하의 여정을 따라가던 독자도 죽는다. 경하는, 인선은, 우리는, 죽음 안에서 4.3을 비로소 만난다. 그리고 경하는 성냥불을 켠다.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죽는 수밖에는 없다, 라고 한강은 말한다. 그리고 이 독특한 임사체험으로 독자를 죽음의 장소로 데려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학적으로) 잠시 죽었고, 그제서야 벽 너머의 희생자를 (문학적으로라도) 만날 수 있었고, 그제서야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도 비로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강은 성냥불을 켜고, 독자들을 다시 삶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소년이 온다>의 동호가 엄마를 "꽃 핀 쪽으로" 잡아끌었던 것처럼. 한강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고통스러워하고, 모두가 죽음과 함께 있고, 모두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8. 엘리멘탈 (피터 손, 2023)

 <엘리멘탈>에 대해서는 훌륭한 리뷰가 이미 많다. 그치만 특전 스티커를 받았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한두 줄 써야 한다.ㅋㅋㅋ 많이들 얘기하셨지만 <인사이드 아웃>보다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과 닮은 점이 많은 동양계 이민자 서사로, 아시안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부모님의 '고생'(피터 손 감독은 이 단어의 영어 번역어는 없다고 말한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의외로(?) 보면서 안 울었다. 영리하고 따뜻하고 훌륭한 이야기인데 나를 울리기엔 2프로 부족했음.ㅋㅋㅋ 암튼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이야기니 다들 두번씩 보세요.

9. 네버 해브 아이 에버 (민디 케일링, 2020~2023)

이건 시즌2 포스터인듯


 하루하루 넷플릭스에 들어가는 게 즐겁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던 시리즈들이 하나둘씩 완결을 맞고, 지난달 <네버 해브 아이 에버>가 시즌4로 종영함으로써 이제 진짜 넷플릭스에는 볼 게 하나도 없게 되었다. 너무 서러운데 다 훌륭한 결말을 맺어서 돌아오라고 화내지도 못함... 그치만 돌아와...ㅠㅠ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줄거리를 요즘 웹소설 식으로 말하면 '존재감 제로 모범생인 내가 학교 인기짱과 사귈 수 있을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는데 1)주인공 데비는 인도계 이민자 2세대이고 2)지난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웹소설식 설정은 맥거핀이고, 이 작품은 이민자 소녀가 아주 깊은 상실을 딛고 일어나 성장하는 이야기다. 데비는 공부는 잘하지만 자기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서툰 아이고, 그래서 4시즌 내내 아주 경솔하고 부적절하고 이기적인 실수들을 일삼는다. 만약 데비가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 고등학생이었다면 그 실수들 중 하나만 했어도 학교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다.ㅋㅋㅋ 그러나 데비는 실수를 좌충우돌 수습하면서 훌륭하게 성장하고, 아까 나왔던 '학교 인기짱'도 성장하고, 데비의 친구들도, 재수없는 라이벌도, 데비 엄마도, 사촌언니도, 할머니도... 아무튼 모두가 성장한다.ㅋㅋㅋ 하이틴 성장물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꼼꼼하게 챙겨주는 작품은 드물다.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세계는 슬퍼해도 괜찮은 세계, 수없이 실수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세계, 모두에게 응원과 애정을 보내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다. 이런 세계를 만날 미국의 청소년들은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그런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너무 ebs 공익광고처럼 썼는데 사실 이 드라마는 정말 웃긴 시트콤이기도 하고 (의외로) 진짜 설레는 하이틴 로맨스기도 하다. 내가 봤던 그 어떤 로맨스보다 삼각관계 재밌게 잘 말아줌... 과연 데비는 진짜 학교 인기짱이랑 사귈 수 있을까요? 지금 넷플릭스에서 확인하세요.ㅋㅋㅋ
 
10.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SF도 많이 읽었고 과학사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지만 이런 책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수학과 과학의 역사를 재료로 삼은 코스믹호러로도 볼 수 있고 픽션을 좀 많이 가미한 과학사 책으로도 볼 수 있는데 어느 쪽이든 확실히 강력하다.
 보통 과학사는 진보와 발견의 역사로 해석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 더 넓고 정확한 세상을 찾아내는 이야기. 특히 양자역학에 대한 역사가 그렇다.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시세계의 진실을 위대한 지성들이 결국 밝혀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발견은 광기와 공포로 연결된다. 과학자들은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진실을 두려워하면서도 집착하고, 광기에 휩싸여 새로운 이론을 발표한다. 위대한 이론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 너머에서 언제든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는 코스믹호러적 괴물이다. 실제 과학자들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깝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의 접근은 분명 엄청나게 신선하고 재미있다. 난 '슈바르트실츠 특이점'이 가장 좋았고, 표제작인 중편은 솔직히 좀 불쾌했음.


분명 한 작품당 한두 줄씩 성의없이 쓰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또 팔만대장경이네...ㅎ 더 많이 봤지만 이런 식으로 다 정리하면 일요일이 사라질 것 같아서 열 편만 채웠다. 암튼 써놓고 나니 올해 상반기도 수확이 많았던 것 같아서 기쁘다. 하반기 목표는 영화나 만화를 더 많이 보는 것, 그리고 (뜬금없지만) 운동을 꾸준히 나가는 것이다. 모두들 무사히 반환점 돌아서 결승점까지 안전하게 달려가시길. 중간에 좀 걸어도 돼요. 오래오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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