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211202 오늘의 일기 본문

2021 교단일기

211202 오늘의 일기

slowglow01 2021. 12. 2. 23:12

어제는 술을 조금 마셨다
술을 마시고 친구와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단 하루도 안 쉬고 매일 아침이 꼬박꼬박 찾아올 수가 있고
어떻게 남은 평생 어른 노릇을 하며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 둘 곳 하나가 없을 수가 있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 잠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계속 바꾸며 도망쳤지만
결국 따라잡혀 살해당하는 꿈을 꾸다 눈을 뜨니
관사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이 끊겨 있었다
세수도 못하고 눈곱만 떼고 출근했다

요즘은 아침에도 별로 웃지 않는다
아침부터 조금 굳은 얼굴 낮은 에너지로 시작해야
마칠 즈음에도 비슷하게 굳은 얼굴과 낮은 에너지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했다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결국 안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냥 아침부터 힘이 별로 없다
전체에 대고 이야기할 때는 미소를 아껴 두고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최대한 많은 관심 웃음 칭찬을 주려고 한다

미술 시간에는 먹물표현을 했다
교실이 엉망이 될 거라고
쉽게 할 수 있는 물서예가 낫지 않겠냐고
교장선생님도 걱정하셨지만
이 수업의 목적은 서예가 아니라 먹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와 탐색이므로
좀 고생하더라도 진짜 먹물과 벼루와 화선지를 쓰기로 했다(먹도 직접 갈고 싶었지만 학습준비물실에 그만한 수의 먹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수업은 제법 잘되었다
문방사우와 수묵화를 소개하고
점을 찍어 작품을 만들어 보았다
아이들은 벼루, 문진 같은 것들을 신기해했고
열 살 어린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대로 깨끗하게 뒷정리도 잘해 주었다

나는 뿌듯했다
물서예를 하거나, 아니면 이런 수업을 아예 하지 않는 길을 두고
교육적 목적을 위해 수고를 한 내가 좋았다.
이런 이유가 있을 때만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다

교사가 되고 알게 된 것은, 이 일은 정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충도 열심히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기준도 없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
교과서만 3분쯤 훑어보고 수업한 적도 있고
저녁 늦게까지 활동지와 피피티와 게임을 만든 적도 있다
그런 것은 오로지 수업하는 나와 아이들만이 안다

공부를 잘하는 나 학보사 일을 잘하는 나
수업실연을 잘하는 나 대외활동을 잘하는 나 임용시험을 잘 친 나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는 자격을 열심히 벌면서 살아왔는데
교사를 잘하는 나는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척도도 점수도 없는 곳에서
나는 아이들의 열띤 표정이라든가, 잘 만든 것 같은 활동지라든가, 아니면 먹물로 그린 그림 같은 작은 지표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성과를 찾으려 한다 나를 좋아하고 싶어서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아무튼 미술 수업은 무난히 잘 끝났으나
특수학생이 붓을 휘둘러 벽에 먹물을 다 튀겨 놓는 바람에
지우느라고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유리창 클리너에 매직블럭까지 동원했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번지는 놀라운 매직
진짜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학생의 자리가 벽 쪽이라 다른 학생들의 얼굴과 옷은 무사했다는 것이다

5교시와 6교시는 각각 국어와 수학이었고
각각 행복과 착잡함의 순간이 있었지만
이제 자야 하므로 그만 써야지
내일은 재밌는 수업을 많이 할 것이다
특히 그동안 온책읽기하던 책의
결말을 드디어 확인하는 날이다
결말에 반전이 있는 책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아이들의 반응이 무척 기대가 된다
독후활동도 알차게 준비해 두었다
어차피 찾아오는 내일이라면 즐거운 하루를 보내자 얘들아

이게 최대한 지운 거...

'2021 교단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기말 종합의견 쓰기 싫어서 쓰는 글  (0) 2021.12.12
211109 오늘의 일기  (0) 2021.11.09
211108 오늘의 일기  (0) 2021.11.08
교사관 잡담  (0) 2021.09.26
나의 방학 숙제  (0) 2021.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