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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부터 ㅎ까지 본문
ㄱ이는 내가 떠난다고 했을 때도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아마 드디어 내 나이를 알게 되어 기뻤을 것이다. 난 ㄱ이의 그런 눈치없음과 해맑음을 내심 걱정하곤 했다.
ㄷ이는 말투가 무심한데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항상 위아래 옷 색깔을 맞춰 입었고 귀여운 머리띠를 썼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당근 같다고 하자 ㄷ이는 마스크 위로 헤헤 웃었다.
ㅈ이는 내가 선물로 준 페이퍼아트 세트에서 강아지를 접어서 내게 다시 선물로 주었다. 뼈다귀와 밥그릇도 세트라고 했다. ㅈ이는 심부름을 아주 좋아했고 칭찬을 받으면 의젓한 척 넵. 넵. 하고 대답을 했다. ㅈ이는 수업태도가 나쁘고 생활지도가 많이 필요했지만 난 ㅈ이의 웃는 얼굴을 정말정말 좋아했다.
ㅅ이는 의젓하고 성실하고 나를 별로 귀찮게 하지 않는 학생이었는데 내가 떠나는 날 가장 많이 울었다. 오은영 선생님인가 누군가가 울지 말라는 말은 좋지 않다고 했던 것 같지만 펑펑 우는 ㅅ이를 안아주면서 다른 말은 생각할 수 없었다. ㅅ아 울지 마. 그러면 선생님 마음이 아파.
ㅇ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가득하다. ㅇ이는 어떤 고학년이 될까?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그 모습을 ㅇ이는 결국 통과해 가게 될까? 내가 남긴 편지가 ㅇ이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았기를, 그래서 ㅇ이가 자기 자신과 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는 사춘기를 보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ㅅ이와는 결국 친해지지 못했다. ㅅ이는 내심 나를 좋아했을까?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말없이 웃기만 하는 성격일까? 미식가인 ㅅ이가 앞으로도 맛있는 것을 잔뜩 먹었으면 좋겠다.
ㅇ이는 요즘 대세인 아이돌 멤버를 닮았다. 앞으로도 그분을 보면 ㅇ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얼마 전 ㅂ이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에 ㅇ이도 있었다. ㅇ이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울었다. ㅇ이가 나를 빨리 잊어버리고 괜찮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디 좋은 청소년이 되기를.
ㅅ이는 또 부반장이 되었다. 2학기 때는 반장이 되고 싶었던 눈치였지만 곧 결과에 만족하고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ㅅ이는 멋진 아이다. 멋진 아이가 스스로도 으쓱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ㅅ이는 멋지니까 그것도 잘 극복할 것이다.
나는 ㅎ이를 아주 좋아했지만 전혀 걱정되지는 않는다. ㅎ이는 새 선생님과도 아주 잘 지낼 것이고 뭐든 잘 해낼 것이다. 그렇지만 ㅎ이의 야무진 눈매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헤어지기 하루 전날 저녁, 편의점 앞에서 ㅂ과 언니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먹을 것들을 사주며 나는 너무 기뻤다. 다른 아이들이 아닌 ㅂ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줄 수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라면 금방 잊겠지만 ㅂ이라면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웃겠지.
ㅇ이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부를 했다. 다른 무엇보다 우정이 중요한 것이니 그것을 소중히 하라고. ㅇ이를 생각하면 너무나 걱정이 된다. 새 담임선생님에게 ㅇ이를 보호해 달라고 충분히 이야기했던가? 했다. 그치만 난 또 전화를 걸고 싶다. ㅇ이가 미움받지 않게 도와주세요. ㅇ이가 더 많이 사랑받게 해주세요. 하지만 간섭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화는 걸 수 없다.
ㅅ이에게 새 잠바를 사주고 싶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아직까지 마음에 걸린다. ㅅ이 아버지는 내 전화를 받고 새 잠바를 사주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다 떨어져 너덜너덜한 잠바를 입고 학교에 다닐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ㅅ이 집에 잠바를 사서 보낼까?...
새 학교 3학년에 ㅈ이와 뒷모습이 똑 닮은 학생이 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그 아이가 내게 종알종알 성가시게 말을 걸어올 것 같다. 말 많고 정 많은 ㅈ이, 우리반 반장 ㅈ이, 시집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ㅈ이가 너무 보고 싶다.
ㅎ이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아이는 천사인가??? 라고 생각했고, 한 학기 동안 지켜본 뒤 정말 천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ㅎ이 같은 학생을 만날 수 있어 행운이었다. 앞으로 ㅎ이를 만날 모든 사람들은 운이 좋은 것이다.
ㅇ이는 코로나에 걸려서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ㅇ이는 좀 개구지고 고학년 같은 구석이 있는 학생이었지만 내 말은 잘 들어주었다. 지금쯤은 등교해서 선물과 편지를 받았으려나?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내일 가는 것을 아냐고 물어봤을 때 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인사를 나누려 하자 손을 빼고 가 버렸다. 서운했지만 1학기 동안 ㅈ에게 충분히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ㅈ은 나의 두 번째 특수학생이었고, 첫 번째 특수학생보다 훨씬 "편했다". 그래서 오히려 ㅈ에게 관심을 덜 쏟았던 것 같다. ㅈ은 나를 용서해줄까? 언젠가 용서가 뭔지 이해하게 된다면...
언젠가 우리반 학생을 tv에서 보게 된다면 ㅇ이가 아닐까. 나는 훌륭한 예술가가 된 ㅇ이을 상상하곤 한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또랑또랑한 ㅇ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흐뭇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상상도 가능하다. ㅇ이는 형처럼 될 수도 있다. 또는 공부에 끝내 미끄러질 수도 있다. 또는...
독특하고 들쑥날쑥하고 빛나는 아이. ㅇ이의 미래가 최대한 첫 번째 상상에 가깝기를.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어도 좋다. 어쨌거나 오로지 ㅇ이의 행복을 빈다.
마지막 날에 ㅂ이는 조용히 울었다.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지만 ㅂ이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우는 걸 달래줘야 하는데 그냥 같이 울고 말았다.
ㅂ이는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쩌면 나는 다른 아이들을 다 합친 만큼 ㅂ이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첫날 오후에 새 담임선생님이 내게 전화해서 ㅂ이 어머니가 자신을 무시하고 책망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그걸 듣고 바로 ㅂ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ㅂ이 어머니로 인해 새 담임선생님이 ㅂ이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내 마음을 찢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ㅂ이가 모두에게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다.
ㅂ이는 어제도 그제도 내게 전화를 걸더니 오늘은 그냥 넘어갔다. 조금 괜찮아진 걸까. 그렇다면 너무나 다행인 일이다.
새로 만난 아이들은 참 귀엽고 순하다. 이름도 벌써 거의 다 외웠다. 그런데도 그냥 보결을 좀 길게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내일이면 우리 반으로 돌아갈 것 같다. 가서 말해줘야지. 선생님은 지난 이틀 동안 1학년 교실에 있다 왔어요. 1학년은 참 작고 예쁘더라. 그치만 역시 여러분이 보고 싶었어요. 여러분도 선생님이 보고 싶었지요?
즐거운 하루를 보내놓고 새벽에 갑자기 아이들 생각에 눈물이 줄줄 나서 이 글을 썼다. 쓰는 동안 눈물이 멎었고 아마 같은 일로 다시 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도 이제 나를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담임선생님 말을 잘 듣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다. 열 살의 남은 나날을 즐겁고 알차게 보내기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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