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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학생들 세 명 합쳐도 내 나이가 더 많다니 본문
새로운 학교에서 1학년 1반 친구들과 함께한 지도 벌써 3일이 되었다. 원래 오늘이 4일째여야 했는데 태풍 때문에 원격등교로 전환되어 간만에 집에서 조금 쉬고 있다. 교과서와 만들기 준비물을 가방에 바리바리 싸줘서 보냈는데 집에서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학년은 처음인데다 학생 수도 전에 가르치던 것보다 많아서, 아이들에게 깔려죽는 건 아닌지 교실이 아수라장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컸는데 예상 외로 아이들이 꽤 순하고 의젓했다. 말도 잘 듣고 쉬는 시간에도 자기들끼리 잘 논다. 다만 좀더 작고 목소리가 쨍쨍거리고(?), 가끔 소매를 올려 달라든가 우유팩을 뜯어 달라든가 하는 부탁을 할 뿐이다. 부탁을 들어주면 쌩 하고 가서 다시 논다. 귀엽다.
둘째날 아침에는 날씨가 좋길래 아이들과 학교 산책을 나갔다. 교과서 이름이 <가을>인데 지금이 가을인 것 같냐고 묻자 대부분이 "아니다"에 손을 든 것이다. 아직 날씨도 덥고 자기는 어제 모기에도 물렸다고 한다. 그래서 가을이 얼마만큼 와 있는지 마중을 가자고 했다.
가을은 벌써 많이 와 있었다. 하늘이 파랗고, 단풍잎은 아직 초록빛이지만 붉은 씨앗이 열렸고, 담쟁이 이파리가 노랗게 변했다. 내가 "여기 보세요, 잎이 노랗게 변했네?"라고 하면 아이들은 "우와아~" 하면서 자기도 노란 잎을 찾았다며 난리다. "우와아~" 하는 소리 안에 반짝이는 호기심과 감탄이 가득해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아 그렇구나! 몸도 좀 풀고 공부할 분위기도 만들어보려고 나갔던 건데, 얘들은 지금 공부하고 있구나! 여덟 살에게는 하늘빛도 단풍잎도 전부 새롭고 놀라운 공부구나! 물론 열 살에게도 열세 살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1학년이 어떤 존재인지 이날 아침에 조금이나마 감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은 모범생이었다.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개구리도 찾고, 달팽이도 찾고, 그래서 무척 흥분했지만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보내주기까지 했다. 고등학생이라면 1등급이다. 이 동네가 소위 말하는 "학군"이 좋은 곳은 아니라고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 기준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이렇게나 예쁘지만 사실 아직 아이들과 별로 친해지지는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지난 3일간 나는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무슨 회의에 불려가거나 아니면 오로지 모니터에만 코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수업종을 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다가 수업 시간을 몇 분 까먹기도 했다. 당연히 나도 같이 놀고 싶고 아이들에게 말도 붙이고 싶지만 전입교사에게 그런 시간은 사치인가 보다. 그래도 아이들은 싸우지 않고 다치지 않고 교실에서 (시끄럽게) 잘 논다. 고맙고 미안하다. 다음 주에는 우리 같이 놀자. 선생님도 아는 놀이 많아...
추석에 대해 배우면서 '송편 만들기 놀이'를 했다. 원래 있던 놀이에서 규칙을 살짝 바꿔서 내가 만들었는데, 술래도 없고 이기고 지는 것도 없는데도 너무너무 재미있게 잘 논다. '송편' 동요를 듣다가 노래가 멈추면 3명씩 짝지어서 송편을 만들면 되는데, 완성된 송편(아이들)을 내가 톡톡 건드리면서 "선생님이 송편 먹었다!" 하면 꺅꺅 비명을 지르면서 웃는다. 나중에는 나를 피해 도망치길래 멀리서 젓가락으로 쏙쏙 집어먹는 동작을 하면서 "선생님이 다 먹었다~!"라고 했다. 으흐흐 쪼끄만 녀석들이라 다 먹어도 한 입거리도 안 되는구만~~~
그치만 1학년 수업은 어렵다. 수업을 크게 방해하는 학생도 없고(신이여 감사합니다) 대부분 아이들이 한글해득도 거의 되어 있지만(오 신이여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다. 학습목표를 보고 어울리는 학습활동을 고안해야 하는데 학습목표를 잘 모르겠다! (특히 통합이 그렇다... 한 단원에 걸쳐 "추석"에 대해 알아보자고 하는데, 아니 그래서 뭘 가르치면 되는데요?) 교과서에서 도움을 받고 싶은데 교과서에... 그림밖에 안 그려져 있다!! 그래서 한 번은 다른 선생님이 만든 자료를 다운받아서 써 봤는데 아이들이... 너무나 안 행복해 보인다!!! 첫 번째 통합 수업에서는 속으로 울었고 두 번째 수업은 그보다는 나았지만 어쩐지 불만족스러웠다.
사실 중간발령을 받은 담임의 일순위 임무는 전 담임이 만들어둔 체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혼란을 최소화하고 학년을 무탈하게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치만 나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특히 눈앞의 과제가 어려울 때는 더더욱 그렇다. 충실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하고 싶고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의욕만은 가득하다.
비록 학생 수가 많아서 한데 모여서 그림책 읽는 것도 힘들지만
비록 교실에 학습준비물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도 안 돼 있지만 (아니 수모형이 없다뇨? 내일 99까지의 수 배울 건데 뭘로 수업합니까?)
비록 텔레비전 모니터가 손바닥만 해서 ppt 활용도 물 건너 갔지만 (원래 ppt 잘 안 쓰기는 함. 근데 아예 선택지를 빼앗긴 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비록 출퇴근이 편도 한시간이 넘어가고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입술에 커다란 물집이 잡혔지만
그래도 예감은 나쁘지 않다. 남은 수요일과 목요일은 좀더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챙겨주며 보내고 싶다. 물파스 꼭 가져가서 모기 물린 아이들에게 발라줘야지. 안 그러면 하루종일 집중 못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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