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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교단일기

투덜투덜투덜 비트주세요

slowglow01 2022. 9. 24. 09:03

어떤 날은 이 직업이 천직 같다가도 다음 날에는 머릿속에 욕만 가득해지니 도저히 일관된 무언가를 쓸 수가 없다. 마스크 위로만 힘껏 웃고 뽀미언니 같은 말투로 말하면서 속으로는 시발.... 시발.....만 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욕은 100% 나를 향한 것이고(나의 체력 나의 업무 나의 수업에 대한 불만족) 어린이들을 향한 마음은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하다.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나면 퇴근까지 두시간 반 정도가 남는데 사실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기에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런데 무슨 회의(엄청나게 많음)에 불려갔다가 급한 업무 좀 처리하고 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십오 분 정도다. 교실 청소 좀 하고 나면 퇴근할 시간. 전 학교에서 같았으면 남아서라도 일을 좀 하고 갔을텐데 여기는 집이랑 멀어서 실무사님 차를 얻어타고 퇴근하기 때문에 일 분도 지체할 수 없다. 다음 날 준비는 하나도 안 됐는데 칼퇴를 해야 한다... '칼퇴'와 '해야 한다'가 한 문장에 쓰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싶지만.

집에서 노트북이라도 붙들고 수업 준비를 좀 하면 좋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뿐더러(일학년 수업은 준비물이 많은데 집에는 없으니까) 자꾸만 '이미 여덟 시간 꽉 채워서 녹초가 되도록 일했는데 집에서까지 돈도 못 받는 초과근무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못 하게 된다. 집안일도 하나도 못 하고 그저 누워있다가 저녁 먹고 다시 누워있다가 잠드는 하루의 반복이다. 취미도 운동도 운전연습도 아무 것도 못 한다.

그러니 수업 준비는 출근길 버스에서 휴대폰으로 부랴부랴 하게 되는데 당연하지만... 잘될 리가 없다. 출근을 하면 누더기 같은 수업을 한다. 겉보기에는 늘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고 가끔 좀 잘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그건 순전히 운이나 요령 덕분이지 내가 수업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가끔은 정말 잘되지 않는 수업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수업들을 교실에 상주해 계신 특수실무사님이 다 보고 계신다. 창피함과 자괴감과 미안함 같은 감정이 마음의 힘을 계속 소모한다. 구멍 난 바가지처럼 마음의 힘이 자꾸 줄줄 새나가서 가끔은 (보통 5교시쯤 되면) 미소와 친절함에 쓸 힘이 부족해진다. 온몸의 체력을 닥닥 긁어모으고 내일 쓸 에너지에서 사채까지 받아와서 겨우 웃어줄 때도 있고, 결국 친절하기에 실패할 때도 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고, 사실 나한테도 미안한 일이다.

(순전히 이름이 멋있다는 이유로) 장학사나 교감, 교장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교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꿈을 접은 이유는 수업과 멀어져 행정업무만 하는 것이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교사로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수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교과서 살펴보기, 학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수학습활동 구상하기, 활동을 위한 학습자료(활동지, ppt, 판서) 준비하기, 학습준비물실을 뒤져서 유용한 학습도구를 찾아내기, 예시 결과물이나 작품 만들기, 동기유발과 마무리 활동 준비하기. 그리고 그렇게 준비한 수업을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 역시 좋아한다.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발견할 때가 더 많다. 즉석에서 새로운 발문이나 활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가 만든 수업이 만족스러웠을 때는 자료를 인터넷에 공유하고 댓글을 읽으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지금은 단 하나도 못하고 있다. 무슨 회의에 불려가고 무슨 업무를 하느라고. 추석에 "애들이랑 이런저런 거 해봐야지!"하고 올렸던 것들도 하나도 못 했다. 나는 대체로 협조적인 노동자다. 월급에도 큰 불만이 없고 회식도 넙죽넙죽 잘 나가고 가끔은 자진해서 무급 초과근무도 한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그리고 교사로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하나도 못 하고 몸과 마음의 체력만 소진되는 기분이 드니 자꾸 불평불만만 늘어간다. 안 그래도 아직 1학년한테 적응도 못 했는데!

<복도에서>
2학년 선생님: 올해 1학년은 1학년답지 않게 야무지네~
나: 네????? 그런 거예요????? (하 아무리 1학년이라도 이렇게 애기 같을 수가...라고 생각하던 중이었음)

그리고 1학년 교육과정에도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교과서를 보고 "뭐 어쩌라고..."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다(특히 통합교과). 학습목표가 뭔지도 모르겠고 이걸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3학년 담임이었을 때는 학습목표에 어울리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1학년 교과서에는 다짜고짜 <놀으세요> 라고 쓰여 있으니 오히려 당황스럽다. 그... 얘들이 이 놀이를 하면서 뭘 배워야 하나요? 가르쳐야 하는 것을 알려줘! 수업을 하고 싶다고! ...이러는 사이에 벌써 한 달이 지났고 '현규의 추석' 단원은 끝나 버렸다. 어쨌든 지도서에서 하라는 수업은 다 했으니 배움은 일어났을 거라고 믿고 싶다.

1학년 담임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욕만 한 바가지 하고 말았군... 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그것까지 기록할 체력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적어두고 싶은 것은, 여덟 살 어린이들의 웃음은 정말로 "까르르" 소리가 나고 거의 마약에 가깝도록 사람을 즉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이 좀 많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