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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교단일기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음

slowglow01 2022. 10. 12. 20:23

10월 12일 오늘의 일기

1. 아이들 전담 수업 보낼 때
3학년 담임일 때의 나: 영어책이랑 필통 챙겨서 줄 서세요.
1학년 담임인 나: (리듬에 맞춰 우렁차게) 가을책~(짝) 필통~(짝) 챙겨서~(짝) 줄~(짝) 서세요~(짝) 가을책~(짝) 준비하세요~(짝) 연필~(짝) 지우개~(짝) 챙기세요~(짝) 줄을~(짝) 서세요~(짝) ...... (모두가 줄을 설 때까지 무한반복)

가끔 내가 선생님인지 에버랜드 아마존의 소울리스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1학년이란 명령어가 끊임없이 입력되지 않으면 절대 실행되지 않는 로봇과도 같다. 오늘은 수업을 시작하면서 "수학책~ 사십이쪽~(역시 박자에 맞춰서)"을 세 번 정도 말했는데, 내가 말하기를 멈추자 자기들끼리 "사십이쪽~ 사십이쪽~" 하고 떼창(?)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싫은 학생 한 명은 "조용히해!! (아차!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조용히 좀 해줄래??? 조용히 좀 해줄래???" 하고 반복해서 소리를 치고... 그리고 그 소란 안에서도 꿋꿋이 사십이쪽을 안 펴는 학생도 있다. 평화로운 1학년 교실~

2. 무용 시간에
무용 선생님은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인데 요즘은 축제 공연을 준비하느라 평소보다 더 깐깐하게 지도를 하신다. 어제는 아이들이 줄을 서서 앞을 보도록 지도하면서 "1학년~ 1학기 때는 엄청 잘했는데 2학기 들어와서 굉장히 산만해졌어요."라고 혼을 내셨다. 나는 그분이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 무척 속이 상했다. 1학기 때 선생님이 무척 질서정연하게 지도를 잘하셨다는 것은 나도 안다. 가끔 아이들에게 소리도 지르는 등 꽤 엄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니 당연히 아이들이 좀 풀어졌을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나?

(사실 내게도 변명할 거리는 있다. 1학기 때 우리 반은 16명이었고 학기말이 되어서야 18명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반은 23명이다. 5명은 큰 숫자다. 그냥 억울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한 선생님이 되는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다. 소리 지르고 싶지 않다. (안 질러본 것은 아니다. 작년에 3학년에게는 몇 번 지른 적이 있다. 다음 해에 4학년을 맡은 선생님도 원래는 미소가 많고 유한 편이셨는데 그 아이들을 맡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셨다.ㅋㅋㅋ...) 무서운 분위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은 도무지 만들고 싶지 않다. 지난주 체험학습을 가는 버스 안에서,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아이들이 조금 소란스럽길래 주의를 주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떠들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내가 뭘 하고 싶었게? 윙크를 하고 싶었다. 손가락 총알을 날려서 아이들을 웃게 하고 싶었다. 아아... 난 죽었다 깨어나도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은 못 될 것이다.

3. 업무 회의를 마치고
전임자 선생님께 인수인계를 받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선생님: 그럼 업무도 제가 하던 거 그대로 하시나요?
나: 네. 교감선생님이 저는 aa랑 bb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 아... aa도 선생님이 하래요? 안 빼주시던가요?
나: 네, 제가 하라던데요...
선생님: 아...ㅎ

그 웃음의 의미, 사실 그때도 이해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이해가 됩니다... 그립습니다 선생님. 그치만 저는 괜찮아요. 편들어주고 도와주는 동료 선생님들도 계시고, 무엇보다 저는 언제든 교장실로 달려가 울어버릴 준비가 되어있어요. 누구든 나를 괴롭히면... 25살 성인이 소리내서 엉엉 우는 꼴을 보게 될 것이야...

4. 남은 이야기들
A가 운동장에 물통을 놓고 갔길래 내가 챙겼다. A를 불러 물통을 건네주는 척하다가 그대로 들고 (천천히) 도망을 갔다. A는 아하하하 웃으면서 쫓아온다.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많지 않은 아이다. 그 아하하하 소리가 오늘의 기쁨이다.

내 껌딱지처럼 붙어다니는 B에게 선생님만 따라다니지 말고 친구들이랑 좀 놀라고 했더니 "시어요"라고 대답한다. 그것이 오늘의 슬픔이다. 어제는 집에 가는 B를 굳이 불러 안아주었다. 하지만 한번 안아준다고 B의 마음에 뚫린 커다란 구멍이 마법처럼 메워질 리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주에 전학 온 C는 한글을 못 쓴다. 두 명이던 교과보충수업 멤버가 세 명이 되었다. 오늘 C는 '솔'을 쓰는 데 성공했고, D는 5-5=0을 이해했고, E는 뭐가 불만인지 끝까지 수업 참여를 거부하더니 복도에 줄넘기를 놓고 갔다. 금요일에는 E에게 4-2=2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한줄짜리 뺄셈식 안에 웃음과 눈물의 대서사시가 있다...

퇴근하는 길에 (뜬금없이) 문학교육을 좀더 연구해서 열심히 하자는 다짐을 했다. 타인의 삶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 약한 것, 외로운 것, 이상한 것,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옆에 설 줄 아는 사람을 기르고 싶다. 문학을 통해 배움의 문을 열고 민주시민교육, 생태전환교육, 일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교육으로 넓혀 가고 싶다. 글자가 눈에 띄어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10091618001#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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