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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이름뭘로하지
늘 그렇지만 고된 하루였다 아이들을 보내고 선생님들과 잠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간식을 얻어먹고 교실로 돌아와 퇴근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 있다가 창문에서 안 보이게 의자를 돌려 놓고 조용히 울었다. 이것보다 더 열심히는 할 수 없어. 이미 최대치를 넘었단 말이야. 발령 받고 단 1분도 학교 생각 안 하고 마음 편히 있었던 적이 없어. 더 열심히는 못해. 더는 못하겠어. 내가 뭘 더 해야 하겠니! 라고도 생각했다가 그 생각은 지웠다. 아이들을 원망하게 되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눈물을 그치고 다시 수업 준비를 하고 오늘도 밤 10시에 퇴근했다. 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누웠다. 내일 아침에는 일단 엉망인 교탁을 치우고 아침 글쓰기 예시를 써 주고 어제 경고했는데도 또 친구를 ..
기싸움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기'라는 것을 전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 살면서 여러 기싸움에 참전(?)도 해보고 지기도 이기기도 해봤겠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3월에는 아이들과 기싸움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겨요? 줄을 서지 않고, 절대 장난을 멈추지 않고,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졌나? 웃은 게 잘못일까? 존댓말이 잘못일까? 이미 져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걸까?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 정색하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일단 얘네들은 너무 귀엽게 생겼다. 오늘 한 명이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는데 세모 입과 토끼 앞니 두 개가 너무 충격적으로 귀여워서 순간 마스크 올리라는 말도 까먹고 말았다. 말은 친절하게, 행동은 단호하게..
잠시도 바르게 앉아있지 못하고 틈만 나면 친구와 장난치려는 아이들과 대답도 잘하고 줄도 잘 서는 아이들 그리고 거의 말이 없는 아이들이 한 반에 있다. 수업 시간은 어렵다. 뭐든 하기 싫고 놀고만 싶다는 첫 번째 아이들을 구슬리고 나무라면서 집중시키는 동안 두 번째 아이들의 얼굴에는 수면 아래 짜증과 억울함이 비친다. 그리고 이 둘을 신경 쓰느라 마지막 아이들의 희미한 표정은 포착하기 너무나 어렵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이들을 거의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한 선생님이 되면 이 어수선함이 바로잡힐까? 더 꼼꼼해야 하나? 더 세심해야 하나? 아니면 가식을 덜고 더 나다운 선생님이 되어야 하나? 아직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고 중요한 3월이 하루하루 지나간다는 조급함만 커진다. 쉬는 시간은 조금..
매일 조금씩이라도 교단일기를 쓰자고 다짐하면서 3월을 시작했는데,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일기는 개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3학년 2반이라는 큰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던져지다가 익사하기 직전에 풀려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잠깐 행복했고, 가끔 뿌듯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저 끝없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화요일에는 교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목요일에는 교실 한복판에서 울어 버리고 싶었다. 아이들이 집에 가고 나면 생각했다. 오늘은 또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떻게 해야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지, 나 때문에 학급이 붕괴되거나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내일은 또 어떻게 하루를 채워야 할지, 그리고 나는 올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광주광역시가 고향이면서 왜 전라북도로 임용시험을 쳤느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얼버무리지만, 실은 불안과 허영 때문이었다. 내 자의식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 광주는 뽑는 인원이 너무 적어서 떨어질까 불안했고, 전라남도는... 너무 낮은 합격 커트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것보다는 공부를 잘 하잖아? 그래서 뽑는 인원도 합격 커트라인도 중간 정도인 전라북도를 선택했는데, 뜻밖에 임용시험을 너무 잘 쳐버리는(?) 바람에 '그러게 광주를 지원하지 그랬냐'는 아쉬운 소리를 잔뜩 들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시험을 잘 봤으니 아마 발령지를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1지망으로 쓴 전주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다...
나는 요즘 자꾸 두들겨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들려오는 모든 소식들이 암담한데,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과거의 내가 쓴 글이다. 1년 전, 학보사에서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오늘 망하지 않을 것이고, 어린이가 미래의 사회를 책임지고 계승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태어나고, 교육자를 향한 사회의 기대 역시 생겨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자꾸 세상이 오늘 망할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망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모래성처럼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데, 손쓸 도리 없이 그 붕괴를 바라만 보고 있는 기분이다. 살면서 큰 위기를 겪어본 적 없는 젊은애의 엄살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
미술교육학자 빅터 로웬펠드가 주장한 개념 중 '도식적 표현'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7~9세의 아동들이 그림을 그릴 때 반복해서 나타내는 표현 방법으로, 산은 세모 모양, 나무는 갈색 기둥 위에 초록색 구름이 앉은 모양으로 그리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실제 산과 나무가 어떻게 생겼든 상관없이 모든 산과 나무를 이렇게 그리다가, 10~11세가 되면 점차 대상과 닮은 사실적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몇 달 전 방을 청소하다가 어릴 때 쓴 동시 한 편을 발견했다. 아마 학교 숙제로 썼던 것 같은 그 시에서 나는 우리 집을 엄마에 비유하고 있었다. 집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언제나 날 반겨주고... 그래서 엄마 같다는 얘기. 아래쪽에는 엄마가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모..
아주 오래 전부터 내 꿈은 오로지 고요와 평화뿐이었다. 고요와 평화. 내가 즐겨 꾸는 백일몽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아주 길고 가느다란 바늘을 귓속에 넣어 내 손으로 고막을 펑 터뜨리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아오마메가 쓰던 것 같은 아주 섬세하고 예리한 바늘로... 그 소설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고 이제는 줄거리도 결말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그 바늘만은 뇌리에 아주 깊숙히 남아 내 공상 드라마의 일등 소품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좀 덜 폭력적이고 더 비현실적인 버전으로,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이 생겨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변호사인지 해결사인지를 고용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입힌, 그리고 이제 사라지면서 입힐 모든 유무형의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