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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이름뭘로하지
해가 바뀌고 한 살을 더 먹을 무렵이 되면 늘 하게 되는 계산이 있다. 내년의 나는, 2008년에 죽은 엄마보다 몇 살 더 어린가? 며칠 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므로 엄마보다는 열네 살 어리게 된다. 이 숫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작아지다가, 계속 작아지기만 하다가 (내가 충분히 운이 좋다면) 언젠가 0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음수가 되는 미래는 아직 상상해본 적이 없다. 엄마보다 오래 살게 될까? 나는 열한 살 때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인생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좆되기도 하고 아예 끝나 버리기도 한다. 열한 살 이후 내 인생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든 시도는 그러나 전부 실패했고 나는 오만 곳을 돌아다녀도, 백만 편의 글을 읽..
학기말 종합의견은 명사형 어미로 끝맺도록,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음슴체'로 쓰도록 되어있다. 정이 많고 쾌활한 성격으로 교우 관계가 두루 원만함. 책임감이 강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학급의 일에 항상 협조적으로 참여함.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말투로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ㅇㅇ이 아빠 엄마에게는 아마 들려주지 못할. 하지만 내게는 가장 중요한 그런 이야기들. 모모는 늘 숙제를 안 해온다. 왜 안 했냐고 물으면 늘 아! 깜빡했다! 라고 한다. 그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바로 내가 초중고 12년 동안 그런 어린이였던 것이다. 아빠는 진저리를 치면서 그놈의 '아 맞다' 좀 그만 하라고 말하곤 했다. 아니, 과거형으로 쓰면 안 된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 11월 월세 내는 걸..
생리 첫 날이었고 어제도 9시까지 초근 오늘도 8시까지 초근하긴 했지만 썩 괜찮은 하루였다. 수업도 나쁘지 않게 했고 크게 속썩을 일도 없었고 맛있는 저녁도 얻어먹었다. 피곤해서 열 시에 누웠는데 졸리면서도 눈 감는 것이 두려웠다. 잠들면 내일이 올 거잖아? 그러면 또 출근할 거잖아? 전담도 없이 국어 수학 과학 과학 체육 수업을 할 거잖아? 갑자기 과자가 너무 먹고 싶었다 짭짤한 감자칩 감자칩이 먹고 싶었다. 월급도 받으면서 관사에 과자 한 봉지도 안 사두고 뭐 했던 거야? 결국 열 시 반에 일어나서 라면땅을 만들어 먹었다. 오른손 엄지에 작은 상처가 있었는데 라면스프가 들어가 무척 쓰라렸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짱 센 호르몬이 울부짖었다 크아앙 얼굴에는 사춘기 여자애처럼 여드름이 다닥다닥 나고..
어제는 술을 조금 마셨다 술을 마시고 친구와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단 하루도 안 쉬고 매일 아침이 꼬박꼬박 찾아올 수가 있고 어떻게 남은 평생 어른 노릇을 하며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 둘 곳 하나가 없을 수가 있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 잠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계속 바꾸며 도망쳤지만 결국 따라잡혀 살해당하는 꿈을 꾸다 눈을 뜨니 관사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이 끊겨 있었다 세수도 못하고 눈곱만 떼고 출근했다 요즘은 아침에도 별로 웃지 않는다 아침부터 조금 굳은 얼굴 낮은 에너지로 시작해야 마칠 즈음에도 비슷하게 굳은 얼굴과 낮은 에너지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했다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결국 안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 낫다..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내가 이상해지는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겠지만 그동안은 일이 힘들어도 그 안에서 뭔가를, 의미든 교훈이든 작은 행복이든 아니면 무거운 고민이든,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오직 피로 말고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수요일에는, 4교시쯤에, 실험 시간에 끝도 없이 떠들고 장난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다가, 아 제발 사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얘들아 그냥 집에 가 라고 생각했다. 나는 1년 동안 무엇을 한 걸까 3월 초, 아무런 준비 없이 기피학년(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교실에 덜렁 버려져 아이들이 왜 이래? 원래 이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야? 생각하며 아이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 그때 다른 건 몰라도 이 녀석들의 듣기 태도만큼은 좀 고쳐주..
사는 곳을 옮겼다. 짐을 싸고 나르고 풀고 청소까지 했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화장실 청소는 아직이다. 내일 해야지. 냉장고는 열심히 닦았는데도 아직도 악취가 난다. 영문을 모르겠다. 요즘은 저녁에 혼자 누워 있으면 불행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부피와 감촉과 무게를 가진 불행이 정말로 방 한가운데 떡 하니 놓여 있다. 이걸 어디 들고 가서 버리고 오고 싶어 방금까지 제주 한달살이를 검색하고 있었다. 내가 다녀올 수 있을까. 어제는 그동안 준비하던 시험이 드디어 끝났다. 시험 끝나면 사려고 벼르던 실을 잔뜩 주문했다. 내일 오려나. 모레 오려나. 포근한 실로 모자와 목도리를 떠서 친구들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오늘은 하루종일 붕붕 뜬 날이었다. 수업 준비도 부족했고 어린이들도 집중을 못하고 나도 집중을 못하고 수업은 삐그덕삐그덕 굴러가다 자주 멈추고 결국 하교 전에 혼을 냈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핑계 대려는 건 아니지만 이게 다 비 때문이다. 다는 아니라도 적어도 50% 이상... 창가 쪽 벽에 머리를 기대고 이 일기를 쓰고 있다. 그치지 않는 끔찍한 빗소리 내일은 또 어찌 보내나 그래도 시 수업은 기본적으로 즐겁다. 학생들은 몰라도 일단 내가 즐겁다. 아직 행과 연의 구조에 익숙지 않고 자기 내키는 데서 줄을 마구 바꾸며 화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법도 잘 모르는 어린이들의 시는 본의 아니게 가끔 훌륭한 현대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맞춤법을 고치고 행을 적당히 나누어 타이핑해서 간만에 에 ..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가 오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완전히 녹아 버린다. 즐거움, 활력, 삶의 의지 같은 것들 안 그래도 내게 부족한 것들이 모조리 빗물에 씻겨 사라진다. 게다가 오늘은 생리 첫 날이었고 어제는 마음이 너무 우울하고 괴로워서 혼자 맥주 한 캔과 심술 3/4병을 혼자 비우고 잠들었다. (당연하지, 생리 전날이고 비 오기 전날인데 우울할 수밖에. 인간의 자유의지란 없다 모든 것은 날씨와 호르몬이 결정한다.) 그리하여 비+생리+숙취의 트리플 디버프 콤보를 안고 출근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오늘은 우리 학년 스포츠 데이였다. 코로나 때문에 대운동회를 못하게 되자 그럼 학년끼리라도 조촐하게 해보자 하고 만든 날이 스포츠 데이다. 3학년 전체래봤자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