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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이름뭘로하지

새 학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긴 써야겠는데, 쓸 말이 많지 않다. 요즘 살만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너무 천사같이 순해서 아직도 가끔 당황하곤 한다. 다만 내가 이 아이들의 순함을 자꾸 부각하고 감탄하는 것이 '얌전하고 말 잘 듣는', '교사를 편하게 하는' 어린이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지 않을지 경계하게 된다. 순한 것도 활발한 것도 둥근 것도 모난 것도 모두 학생의 개성이다. 교사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과 공동체의 질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그 개성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에너지 준위가 높지 않고 교사에게 협조적이며 자기들끼리도 (아직까지는) 원만하게 잘 지낸다. 나는 이러한 특성을 객관적인 눈..

3월 9일 그날은 새벽 두 시 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표율이 80퍼센트가 넘어갈 때까지 깨어 있다가 착잡한 마음으로 잠들었는데 아침에도 기적은 일어나 있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어떤 곳이 될까. 약하고 외롭고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과 눈꺼풀을 안고 출근해 1교시 전담 시간 동안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2교시는 사회. 교과서는 펴지 말라고 했다. 오늘은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를 할 거예요. 우리가 지난주에 만든 약속 있죠? 선생님이 그걸 바꾸려고 해요. 오늘부터는 새로운 약속으로 생활할 거예요. 아이들은 아직 별 반응이 없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요? 그러세요 그럼... 하는 온순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젠장 너무 착한 어린이들..

일요일 저녁에 한 줄이 나와서 출근했는데 컨디션이 심상치 않았다 목과 머리가 아팠고 으슬으슬 추웠다 그래도 코로나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비가 오는데 너무 얇게 입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바보 불행 중 다행으로 월요일에는 수업이 한 시간밖에 없다 1교시에 반장을 뽑고 나머지 시간 동안은 아 추워, 아 춥다, 중얼거리며 교무실에 앉아있거나 휴게실에 누워있었다 그때 검사를 해볼걸... 하는 후회를 아직까지 하고 있는데 또 생각해보면 그때 검사했어도 한 줄이 나왔을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을 집에 보낸 후 다시 검사를 해보았는데 처음에는 선명한 한 줄이었다가 점점 아주 희미한 두 번째 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홀리... 5분 후에 교무회의가 있었는데 일단 병원으로 뛰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도 무..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정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정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많은 일이 실은 몸의 일이다. 사랑도 고뇌도 이상도 절망도 전부 몸의 일. 그리고 공부도 몸의 일. 그래서 3학년 국어는 몸의 말, 감각적 표현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를 읽어보기 전에 먼저 시를 바라보고, 맡아보고, 맛보고, 들어보고, 만져보는 것이다. 몸의 말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시에서 말하는 이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고 묻는 교과서는 덮어 두고, 김기택의 동시집 에서 시 두 편을 빌려 왔다. 뜨거운 호두과자 오른손이 뜨거워 왼손 왼손이 뜨거워 오른손 두 손 다 뜨거워, 후딱, 입에 넣은 호두과자 놀라 통통 튀는 호두과자..

1교시는 수학 첫 시간.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학생들의 기초연산 능력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엑시트 프로젝트 http://exitbasic.com 에서 덧셈과 뺄셈 진단 자료를 내려받아 활용했는데, 학생이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막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있어 좋았다. 한 자리 수의 가르기와 모으기부터 두 자리 수의 덧셈과 뺄셈까지 총 8단계로 되어 있는 문제들을 주었는데 80%의 학생들은 전혀 어렵지 않게 모든 문제를 금방 풀었고(채점을 아직 안 해서 점수는 모르겠으나) 4~6단계쯤부터 헤매면서 내 도움을 받아 끝까지 푼 학생이 두 명 3단계쯤부터 어려워하다가 5단계쯤까지 푼 학생이 한 명 1단계부터 아예 감을 못 잡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가족이 확진이 되어 등교중지 중인 학생도 한 명 있는데,..

둘째 날에는 학급 규칙(우리 반 약속)을 만들었다. 약속이 무엇인지, 왜 지켜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후 칠판을 넷으로 나누고 각각의 칸에 '선-우', '우-선', '우-우', '우-학'이라고 적었다. 아이들이 선우우선우우우... 하고 읽으며 재미있어한다. 각각의 칸에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을 적을 것이다. 첫 번째 칸에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을 적는다. 선생님도 이 교실의 일부이고, 똑같이 규칙을 지키는 존재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지켜주었으면 하는 약속이 있나요? 라고 물었더니 쉽게 대답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럴 줄 알고 두 가지의 예시를 가져왔다. 1. 모르는 건 친절하게 알려주기 선생님은 여러분이 모르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여기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모르면 모를수..

3월 2일. 작년에 이어 올해도 3학년 2반. 칠판에 감정카드를 잔뜩 붙여놓고 멋진 첫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아침시간 내내 교실을 비우다시피 했다. 이따금 급하게 교실에 들르면 울망울망 수줍은 얼굴의 꼬마들이 어색하게 나를 흘끔거렸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목소리도 작다. 얼마 전까지 열한 살에 가까운 열 살과 지내다가, 오랜만에 아홉 살에 가까운 열 살을 보니 너무나 아기 같아서 새삼 놀라웠다. 아이들은 일 년 동안 정말 부지런히 자라는구나. 이제는 듬직한 4학년이 된 작년 학생들도 3월에는 이렇게 아기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시업식을 마치고 선생님 소개로 1교시를 시작했다. 화면 가득 수수께끼 같은 낱말들을 띄워 놓고, 이것들이 무슨 뜻인지 맞춰 보..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나만의 우주 만들기'https://createmyuniverse.co.kr/main라는 사이트를 본 적이 있다. 여러가지 아이템 중 세 가지를 골라서 나만의 우주를 꾸밀 수 있는 사이트로, '나' 캐릭터의 자세나 표정도 선택할 수 있다. 선택권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나만의 우주를 채워넣을 아이템을 고민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고, 무엇보다 귀엽다. 새학년 자기소개 활동을 고민하다가 그 사이트가 떠올랐다. 이거 학생들이랑 하면 재밌겠다!! 그래서 또 연필과 싸인펜으로 뚝딱뚝딱 활동지를 만들어 봤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2022년이지만 내게는 아직도 태블릿이 없어 손으로 활동지를 만든다. 솔직히 말하면, 싸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스캐너 어플로 사진을 찍어 편집하는 그 번거로운 과..